다양한 아이스크림의 세계

만년설의 힘을 빌려 아이스크림의 탄생과 관련한 야사의 발현지 역할을 해서 그런지,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문화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다채롭다. 흔히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젤라토’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아이스크림의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는 그라니타 (granita, 또는 granita siciliana)가 있다. 과일즙 등에 설탕을 섞어 얼리면서 포크로 잘게 부숴 자잘한 얼음 결정을 만드는데, 완전히 얼린 얼음 덩어리를 갈아 만들 수도 있으므로 우리가 즐겨먹는 빙수나 ‘쭈쭈바’와도 비슷하다. 이름에서 파악할 수 있듯 그라니타는 시칠리아 섬에서 비롯되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시칠리아의 ‘원조’는 얼음 결정이 조금 더 굵거나 거친 편이다. 시칠리아 섬에서는 그라니타를 즐겨 먹는 나머지 아침상에도 올린다. 버터를 푸짐하게 넣고 반죽해 부드러운 빵 브리오슈(brioche)에 곁들여, 반으로 가른 빵 위에 그라니타를 풍성하게 올려 먹는다. 이렇게 시칠리아의 대표 빙과인 그라니타는 사실 집에서도 아주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레몬을 비롯한 과일즙이나 커피 등에 설탕을 섞은 뒤 냉동실 사용이 가능한 밀폐용기에 담아서는,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면 매 30분마다 포크로 얼음 결정을 잘게 부숴주기만 하면 된다.

시칠리아의 전통 그라니타는 레몬, 귤, 재스민, 커피, 아몬드, 박하맛이며 제철일 때는 산딸기나 오디로도 만든다. 귤과의 교배종이라고 알려진 ‘마이어 레몬(meyer lemon)’과 비슷하고 신맛이 더 강한 시칠리아 특유의 레몬이나 쓴맛이 강한 것들이 종종 섞여 있는 아몬드 덕에 시칠리아의 레몬 또는 아몬드 그라니타는 지역 고유의 맛을 지니고 있다. 시칠리아 특유의 맛은 내기 어렵겠지만 레몬즙 3개분(180ml), 물 820ml, 설탕 330g을 잘 섞어 위의 방법대로 얼리면서 꾸준히 얼음 알갱이를 부수면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 그럴싸해 보이는 레몬 그라니타를 만들 수 있다. 그라니타는 아이스크림과 달리 서걱서걱하게 얼음알갱이를 살리는 것이 매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게 얼려야 하므로, 유지방을 첨가하지 않은 과일 주스 등을 주원료로 쓰고 와인(13도 전후)보다 높은 도수의 주류를 쓰지 않는다.

이탈리아어로 '얼렸다(frozen)'는 의미의 젤라토는 사람들에 따라 그 정의가 갈린다. 계란 노른자나 크림 때문이다. 진짜 젤라토는 두 가지 재료 없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의견과 반대 의견으로 나뉘지만 허무하게도 둘 모두 정답이다. 다른 아이스크림과 젤라토를 구분 짓는 특성은 사실 그 두 가지 재료의 첨가 유무가 아니라, 특유의 낮은 오버런(overrun)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버런은 아이스크림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불어넣는 공기의 비율이다. 대부분 아이스크림의 오버런이 40~60% 사이라면 젤라토의 오버런 은 20%, 따라서 훨씬 더 밀도가 높다. 이렇게 밀도가 높은 젤라토의 비밀은 가공 시간에 있다. 보통 아이스크림에 비해 훨씬 더 짧은 시간 동안 공기를 불어넣으므로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젤라토가 이름처럼 베이스를 완전히 얼린 상태임을 의미한다면, 이름 그대로 반만 얼려 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인 아이스크림도 있다. 바로 '세미프레도(semifreddo)'다. 젤라토를 비롯한 일반 아이스크림과 달리 공기를 불어넣지 않은 채로 얼리는 대신, 거품기로 저어 단백질의 수소 결합을 깨 구조를 바꾼 계란 흰자인 ‘머랭(meringue)’이나 같은 방식으로 올린 크림(whipped cream)을 더해 부드러움을 확보한다.

프랑스에서는 아이스크림을 ‘글라세(Glace)'라고 부른다. ’얼음‘이라는 의미다. 계란 노른자로 걸쭉함을 불어넣는 프렌치 스타일 아이스크림의 베이스는 사실 제과제빵에서 두루 쓰이는 만능 소스의 변형이다. 커스터드, 또는 영국식 크림이라는 의미에서 ‘크림 앙글레즈(Crème Anglaise)‘라고 부르는데 주재료인 계란 노른자, 크림, 설탕의 비율을 조절해 걸쭉함의 정도에 변화를 줘 다양하게 쓰인다. 프랑스의 고전 디저트인 ’크림 브륄레(Crème Brûlée, 태운 크림)’ 또한 크림 앙글레즈를 물중탕에 담가 오븐에 익힌 뒤 올린 설탕을 토치로 지져 태워 만든 것이다.

한편 유제품을 전혀 더하지 않고 과일즙이나 설탕 등으로만 만든 베이스를 아이스크림처럼 저어 공기를 불어넣으면서 얼렸을 경우 이를 ‘소르베(sorbet)’라고 부른다. 이름이 비슷해 헛갈리는 ‘셔벳(Sherbet)’은 유제품 함유량이 수분 전체의 50% 이하라는 차이가 있다. 8~90년대 카페 문화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파르페(Parfait)'라는 명칭이 낯익을 것이다. 어느 카페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높고 좁은 잔에 생크림이며 아이스크림, 쥬스, 과일 등을 켜켜이 담고 일본식 모형 우산을 꽂아 마무리한 음료가 당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파르페는 세미프레도처럼 아이스크림 베이스를 틀에 넣어 공기를 불어넣지 않고 얼린 디저트를 의미한다. 한편 이탈리아의 세미프레도처럼 머랭이나 올린 크림에게 부드러움을 맡기는 ’얼린 무스(Frozen Mousse)’나 ‘얼린 수플레(Frozen Souffle)’도 프랑스의 얼린 디저트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을 집중 소개했지만 이 두 나라에서만 아이스크림이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인도를 비롯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등의 남아시아 지역에는 ‘쿨피(Kulfi)’가 있는데, 이 또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빚을 졌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우유에 설탕과 다른 재료의 맛을 더해 천천히 졸이면 연유가 되는데 이를 틀에 넣어 굳혀 만든다. 장시간 조리해 우유 특유의 캐러멜화한 맛이 돋보이는 쿨피는 틀에 넣어 굳히므로 프랑스의 파르페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하드’로 통칭하는 ‘OO바’ 류의 아이스크림과도 비슷하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쿨피왈라(kulfiwallah)’라는 상인들이 쿨피를 파는데, 녹지 않도록 틀에 담은 쿨피를 ‘마트카(matka)’라는 자기에 넣고 얼음과 소금을 채워놓는다. 한편 아랍에는 ’팔루데(Faloodeh)'라는 디저트가 있는데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가는 당면에 설탕과 장미수의 시럽을 섞어 얼린, 아이스크림의 시초 격이다.

아이스크림을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꽤 까다롭다. 베이스에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얼려야 하므로, 반드시 제조기가 있어야 한다. 종종 그라니타를 만드는 식으로, 즉 일정시간마다 베이스를 숟가락이나 포크로 휘저어주는 것만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는 블로그 포스팅 등을 보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공기를 불어넣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결과물은 아이스크림이라기보다 위에서 소개한 파르페나 얼린 무스에 더 가깝다. 아이스크림의 생명인 부드러움을 불어넣을 수 없으니 서걱거리는 얼음 덩어리를 먹게 될 확률이 높다.

아이스크림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정용 제조기를 하나쯤 사는 것 또한 충분히 고려해볼 만하다. 가장 기본적인 제품은 온라인 가격 검색 사이트 기준으로 3~5만 원대면 살 수 있다. 원리는 지난 포스팅에서 설명했던, 원시적인 나무통 아이스크림 제조기와 같다. 베이스를 담는 용기의 벽에 냉매를 담아 미리 얼려 온도를 낮추는 동시에 플라스틱으로 된 날로 저어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이다. 필자가 근 8년째 쓰고 있는 제조기도 같은 원리의 가장 보편적인 제품으로, 미국에 있을 때 단종품을 30달러쯤에 싸게 산 것이다.

물론 가격이 저렴한 만큼 이런 아이스크림 제조기는 단점도 분명하다. 냉매가 든 통을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적어도 24시간 전에 꽁꽁 얼려 준비해야만 한다. 또한 모터의 속도가 느린 탓에 아이스크림의 밀도가 높은 편이고, 한 번 냉매통을 얼려 한 번 밖에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없다. 그래도 집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들어 먹는 데는 절대 모자람이 없다. 한편 자체 냉각기가 달려 연속 제조가 가능한 ‘업그레이드’ 아이스크림 제조기도 있지만 기본형에 비해 최소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는 비싸다. 사실 어떤 제조기를 쓰더라도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데는 어차피 최소 만 하루 이상이 걸린다. 아이스크림 최대의 적인 얼음 결정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베이스를 완전히 식혀 냉장실에 최소 8시간 이상 숙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제조기 대신, 야채나 견과류 등을 다지거나 가는데 쓰는 ‘푸드프로세서(food processor)’로 만드는 아이스크림 레시피 또한 시험해보았다. 미국의 음식 사이트 ‘시리어스이츠(www.seriouseats.com)’의 켄지 로페즈-얼트(J. Kenji López-Alt)가 제시했다. 과학과 실험을 바탕으로 레시피를 개발하는 코너 ‘푸드랩(The Food Lab)’의 담당자인 그는 역시 부드러움의 적인 얼음 결정의 생성을 막기 위해 수분 대비 지방과 단백질의 비율을 높이는 콘셉트를 제안한다. 이를 위해 우유에서 수분을 덜어내 농축한 무가당 연유(Evaporated Milk)를 쓰고, 올린 크림(whipped cream)로 미리 공기를 불어넣는다. 이를 얼음틀 등에 넣어 꽁꽁 얼린 뒤 여분의 크림을 더해 푸드프로세서로 갈아 다시 얼리는 방식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순수한 무가당 연유가 없으므로 이를 가당연유로 대체해 시험해 보았는데(이태원 등지의 외국 식품점에서 파는 무가당 연유는 구분하자면 ‘filled milk’로 우유를 가열 농축한 게 아닌, 분유에 물을 섞은 뒤 팜유 등의 지방을 섞은 우유 대체품이므로 레시피에서 제안하는 효과를 볼 수 없다), 아이스크림 제조기의 부재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는 있었지만 얼려가며 공기를 불어넣어 얻은 부드러움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으니 결과물은 일반 아이스크림보다 오히려 젤라토에 더 가까웠다. 저지방 아이스크림의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두 번에 걸친 아이스크림 포스팅을 마무리하겠다. 맛있는 음식은 많고 늘어가는 뱃살은 주체할 수 없으니 전 음식 분야에 걸쳐 저지방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아이스크림도 예외는 아닌데, 저지방 제품의 경우 지방을 뺀 만큼 아이스크림의 생명인 부드러움이 떨어지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해 우엉 등의 뿌리에서 추출한 다당류인 이눌린(inulin)을 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효과는 역시 진짜 지방을 넣은 것과 비하기 어렵다. 게다가 맛의 매개체인 지방을 덜어냈으므로 식감뿐 아니라 맛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은 한때 무지방 저칼로리 디저트로 인기를 얻었던 얼린 요거트(Frozen Yogurt)도 크게 다르지 않다. 뺀 지방뿐만 아니라 요거트 특유의 신맛을 덜어내기 위해 설탕을 많이 집어넣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역시 아이스크림 같이 풍성함이나 부드러움이 매력인 디저트는 그 매력을 최대한 담고 있는 걸 조금씩 적당히 먹는 편이 가장 바람직하다.


Source from http://yorycook.tistory.co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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